2023.2.19. Lingdong 장로교회의 Cui Guiman 목사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의 입장에 서기 위한 팁“
나는 18살 때 키에르케고르의 책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통해 만났다.
고통과 불행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알지 못하고 멍해 있을 때, “이것이냐 저것이냐?”
나는 이 책의 “가장 불행한” 부분을 읽으면서 이 구절을 발견했다.
“우리는 죽음보다 더 나쁜 불행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큰 불행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실제로 세상에 단 한 명의 불멸의 사람이 있고 그 전설적인 영원한 방랑 유대인이 밝혀지면 우리는 도울 수 없습니다.
자신이 가장 큰 불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무덤이 비어있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즉, 죽지 않는 사람, 묻히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비참합니다.
자, 이야기가 풀렸고 답은 단순하다.
오래된 죽음 행복한 사람이 행복하고, 젊어서 죽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환생하고 죽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
야 세상은 그렇지 않다.
죽음은 보편적인 행복이다.
그래서 찾기가 어렵지 않다.
, 인간 중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Kierkegaard의 작업은 저에게 엄청나게 공감했습니다.
이 기사는 인생이 불행하다는 나의 생각을 크게 강화시켰고, 그 이후로 나의 생각은 더 비관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책의 번역가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이 그리스 문학에서 나온 아이디어라고 주석에서 설명했다.
나는 그것이 이 리뷰에서 설명된 것이라고 생각했고, 나중에 성경을 통해 이 불행한 세상이 마음대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이유와 우리가 이 세상을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
삶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성경을 통해 분명해졌을 무렵, Keer Kegaard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해 이 대사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Kierkegaard의 말은 전도서의 이 구절과 매우 유사합니다.
어느 쪽이든 괜찮아.”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신학적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전도서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전도서 4:1)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모든 학대를 받는 것을 보았노라 슬프도다, 억눌린 자들이 울고 위로가 없구나. 그들의 압제자들은 그들의 손에 힘이 있지만 위로는 없습니다.
(전도서 4:2) 그러므로 나는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이 산 사람보다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전도서 4:3) 차라리 나지 아니하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을 보지 아니한 것이 나으니라
일반적으로 전도서는 솔로몬 왕이 쓴 것으로 여겨집니다.
솔로몬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사람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부러운 지혜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가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고 솔로몬은 백성을 올바르게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왕상 3:4)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에 큰 산당이 있는지라 솔로몬이 그 위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왕상 3:5) 그 밤에 여호와께서 기브온에서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게 청하여 무엇을 구하라 하시니
(왕상 3:6)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정직과 의와 정직으로 주와 함께 행하사 주께서 큰 은혜를 베푸셨고 오늘 이 시대에 앉을 아들을 내게 주셨습니다.
(왕상 3:7)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아버지 다윗을 이어 왕으로 한 종을 세우셨으나 주의 종은 아직 어려서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열왕 첫째 3:8) 우리는 여호와의 선택된 백성입니다.
그 수가 너무 많아 계수하거나 기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3:9) 누가 당신의 위대한 백성을 재판하겠습니까?
(열왕 첫째 3:10) 솔로몬의 요청은 여호와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지혜만 주신 것이 아니라 부와 영광도 주셨습니다.
아마도 그가 입을 열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소원을 미리 아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왔을 때 욕심을 버리고 오직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지혜를 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지혜뿐 아니라 부와 영광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가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먼저 자신의 욕심을 구한 다음 당연히 많은 재물을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기도에 응답하십니까?
(왕상 3:11)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구하는 것이 이것이라 네가 자기를 위하여 구하거나 재물을 구하지 아니하거나 네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고 그러나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왕상 3:12) 내가 네 말대로 행하여 네게 지혜와 깨닫는 마음을 주노니 당신 이전에도 당신과 같은 사람이 없었고 당신 이후에도 당신과 같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왕상 3:13) 내가 또 네게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주어 네가 사는 동안에 너와 같은 왕이 없게 하리라
(왕상 3:14) 네가 만일 네 조상 다윗이 행한 것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솔로몬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 땅의 모든 사람보다 지혜와 총명이 뛰어난 위치에 섰습니다.
그 때에 여러 나라의 왕들이 그의 지혜를 들으러 왔다.
그 중에는 유명한 시바의 여왕이 있습니다.
이 전도서는 그의 말년에 기록되었습니다.
((왕상 4:29)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큰 지혜와 총명을 주사 해변의 모래 같이 넓은 마음을 주셨고
(왕첫 4:30) 솔로몬의 지혜는 모든 동양인과 이집트인의 지혜를 능가했습니다.
(왕상 4:31)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우며 이스라 사람 에단과 헤만과 가골과 마호의 아들 닷다보다 더 지혜로와 그의 이름이 온 땅에 알려진지라
(열왕기상 4:32) 그는 3000개의 잠언을 말하고 1050개의 찬송을 불렀습니다.
(왕첫 4:33) 그는 또한 레바논의 백향목에서부터 벽에서 자라는 우슬초에 이르기까지 식물에 대해서도 말한다.
(왕상 4:34)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의 모든 왕이 그의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
그의 전도서 책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
(전도서 1:1) 전도자, 예루살렘 왕 다윗의 아들.
(전도서 1:2) 전도자는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전도서 1:3) 사람이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전도서 1:4) 한 세대는 가고 또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도서 1:5) 해는 떴다가 지고, 떴던 곳으로 곧 돌아갑니다.
(전도서 1:6) 바람은 남쪽에서 불다가 북쪽으로 돌이킵니다.
(전도서 1:7) 모든 강은 바다로 흐르지만 바다를 가득 채우지는 못합니다.
(전 1:8) 만물의 피곤함을 말로 표현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차지 아니하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전도서 1:9) 이미 한 일이 다시 일어나고 이미 한 일이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
(전도서 1:10) 보라, 이것을 새롭다 할 수 있느냐?
(전도서 1:11) 전생도, 내생도, 내생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Kierkegaard는 그의 책에서 다시 썼습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말을 타고 싶지도 않다.
운동이 너무 격렬하기 때문입니다.
너무 힘들어서 걷고 싶지 않아요. 눕고 싶지도 않습니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눕고 싶지도 않습니다.
또한, 나는 그것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특히 싫어합니다.
일어나고 싶지 않아 결국 아무것도하고 싶지 않아. “
어떻게?
인생에 대한 비관적 전망의 끝이 보이지 않습니까!
전도서 1장에 나오는 키에르케고르의 “내 인생관은 인생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라는 말은 “디아프살마타”의 첫 부분인 “이것이냐 저것이냐”에 기록된 대사이다.
Tianxia가 한 모든 일을 조사하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이 문장은 무슨 뜻입니까!
(전도서 1:13) 나는 한마음 한뜻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살핀다.
(전 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둘 다 이런 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인생이 실제로 그렇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궁극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하기 위해 도입된 단어이다.
그러면 전도서를 기록한 솔로몬은 무엇으로 시작했습니까?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느낀다.
그런 다음 내가 없으면 고통이 사라집니다.
이 존재로부터의 해방 상태는 불교에서 열반(Nirvana)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걸까?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결코 간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통증의 원인과 통증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합리적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솔로몬이 그것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보면 그것들이 모두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진정한 지식의 확실성을 얻으려면 그 반대를 올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선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그 반대인 악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인 것은 절대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므로 솔로몬은 “다 헛되이 다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많은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그 결과 많은 지식과 지혜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인생의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그는 자신이 한 일에 결코 절대적으로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이 사실은 그의 고백 속에 감추어져 있다.
(전도서 1:16) 내가 내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에 지혜와 총명을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들보다 지혜를 많이 얻었다 하였노라
(전도서 1:17) 내가 다시 내 마음을 지혜와 광기와 어리석음을 알려 하였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도서 1: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고 지식이 많으면 슬픔도 많습니다.
그의 아픈 고백의 근원은?
그의 불만, 불안, 걱정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불행의 원인을 파헤치고 해결책을 모색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친척은 항상 변경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잡을 수 있는 순간에 잡으려고 하면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잡히지 않는다.
솔로몬은 이 질문에 대해 혼자 고민하며 잠시 이 문제를 마침내 해결했다고 생각했지만, 이 순간 다른 질문으로 바뀌었고 답의 끝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철학은 인간의 본질을 탐구함으로써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지만 결국 철학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사용하려는 솔로몬의 시도는 그 자체로 철학적 해결이지만 결국 그 접근은 실패한다.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는 말을 통해 인정했다.
오히려 이런 접근이 그에게 더 큰 고통과 불안을 안겼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전혀 없는 걸까요?
그는 일련의 실패를 통해 자신이 절대적인 것에 의지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므로 그가 행하시는 일도 변함이 없으시므로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모습은 언제나 진실할 것입니다.
유일하게 참될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만드는 그의 속성인 ‘선함’뿐이며, 그것이 유일한 길이요 수단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수단이 될 때 그 수단은 절대적으로 불변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이 도구가 될 때 그 도구는 절대적이고 전능하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 문장에는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사랑도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이 지식이 있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그를 교만하게 하는 불완전한 도구가 될 것이며 그의 영혼에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8:1) 우리 모두는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지적 오만 사랑이 쌓이다
그래서 전도서 후반부에서 솔로몬은 특히 젊은이들을 권면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에 창조주를 기억하기를 간절히 권합니다.
삶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초대입니다.
노년에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인생이겠습니까!
젊은 시절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지식을 쌓아 불행한 삶을 살지 않을까 걱정하며 “얘야, 다시 경고를 받으라”고 경고했다.
(전도서 12:12) 내 아들아 조심하라 많은 책을 쓰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읽는 것은 피곤하다.
그래서 젊을 때 창조주 하나님을 알아가서 인생의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잃지 않도록 권합니다.
청년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받고 누릴 기회를 가진 자입니다.
기쁨이 가깝지 않다 하는 해가 오기 전에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잡는 사람은 복이 있고 행복합니다.
(전도서 12:1) 너는 젊었을 때 곧 재앙의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불행하다고 말하기 전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솔로몬은 젊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한시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본래 지혜로운 사람은 신앙의 구렁텅이에 빠져 투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뼈아픈 실패로 얻은 경험을 젊은이들에게 쏟아냈다.
이것이 그의 전도서의 끝입니다.
Cynics는 우리에게 젊을 때 즐기라고, 마음껏 즐기라고, 보고 듣는 것은 우리의 기록된 말이며, 우리의 다음 세대가 이 고통스러운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의 인생은 전도서의 고백처럼 비관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진짜 불행한 인생이었다.
젊은 시절에 그는 세상의 지식과 지혜에 따라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인생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정하듯이 인생은 무의미하다.
그러한 삶에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솔로몬은 이 점에 대해 젊은이들에게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전 11:9) 청년들아 청년의 때를 기뻐하며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라 네 마음이 행하는 것과 네 눈에 보이는 것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에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도서 11:10) 그런즉 네 마음에서 근심하고 네 몸에서 악을 멀리하라 어린 시절과 젊음이 헛되도다
솔로몬이 인간의 삶의 무의미함과 자연의 무의미함을 인정한 것은 첫 인간 아담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올바른 병인 진단 없이는 올바른 처방을 내릴 수 없습니다.
삶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해결책이 올바른 처방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원인에 올바르게 접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지성으로 해결하려는 솔로몬의 시도는 철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러나 그는 문제가 결국 해결될 수 없다는 점도 인정했다.
인생의 불행과 만물의 굴복은 아담의 죄 때문입니다.
죄로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뜻 외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들의 강림을 통해서만, 즉 신성한 사랑과 구속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속성에 따라 인류를 회복하는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쓴 사도 바울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로마서 8:19)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로부터 계시를 받기를 갈망합니다.
(로마서 8: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주관하신 주로 말미암음이라
(로마서 8:21) 피조물 자체가 부패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바람입니다.
(로마서 8:22) 우리는 피조물이 지금까지 고통 속에서 함께 탄식해 왔다는 것을 압니다.
그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행복한 사람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우리 몸의 구속을 통해서라고 반복해서 언급하고 강조한다.
(롬 8: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롬 8:24) 우리가 소망 중에 구원을 얻었나니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라 그가 본 것을 누가 기대합니까?
(로마서 8:25)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바라면 참을성 있게 기다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도자 솔로몬도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너희가 모든 일의 결국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했습니다.
기록의 끝에서 이것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전도서 12:13) 결말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선악간에 모든 행위와 모든 비밀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불행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결되는 순간에 대해 성경은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불행했던 사람들을 행복한 위치에 두었습니다.
(계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 중에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리라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였노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